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14] 오원배의 신작 혹은 소외된 현대인의 초상 - 윤범모(1998)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전시: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 오원배展(1998.11.11-11.29, 조선일보사)
리뷰: 오원배의 신작 혹은 소외된 현대인의 초상
글 : 윤범모(미술평론가)

무엇인가 음산하다. 암울한 상황이 어깨를 찍어 내리고 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기도 하다. 그것은 현대인의 초상이다.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소외된 인간의 표정이기도 하다. 오원배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첫 인상이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림하면, 그렇다. 그림하면 떠오르는 예쁘고도 장식적인 효과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 에 얻어지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그림은 대충 살펴보면서 분위기나 띄우는 경우의 작품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이 대목에서 오원배의 저력과 특 징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하게 하는 그림. 바쁜 일상사의 현대인의 싫어하는 유형의 작품이 다. 하지만 작가는 당사자의 관심 유무와 관계없이 그네들의 현대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

오원배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한마디로 어느 거리에서나 만날 수 있는 소시민들이다. 그들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할 따름이다. 익명의 거리에서 방황하는 도시인이기도 하다. 새로운 상황에 대하여 두려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예측할 힘도 없으면서 무엇인가 기대하기도 한다. 물론 거기에는 심리적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불안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슴을 앓기도 한다. 또한 심한 경우는 실어증에 빠져 헤메기도 한다. 인간 소외. 오원배의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오원배의 인간은 으레 청년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희망찬 미래만을 담보하고 있질 못하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무언인가 다음의 상황을 대기하고 있다. 대개는 단독이다. 아니 모여 있다고 해도 대여섯명을 넘지 못하고 있다. 외로움은 오히려 사치일 수 도 있다. 절박한 상황이기도 십상이어서 물심 양면의 여유를 생각할 틈새도 없다. 그들은 삭발을 하고 있다. 또한 상반신은 나신이다. 벗어제낀 윗도리. 하지만 바지는 청바지 같은 작업복 차림이다. 무엇인가 육체를 움직여야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느낄 수 있는 젊은이들 같다.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크게 활동할 공간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하다.

오원배의 청년은 표정이 없다. 아니 그들의 표정은 무거울 따름이다. 음습한 공간에서 자신들의 욕망이 부질없음을 확인하고 절망할 따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외되고도 무기력한 현대인의 초상이다. 그들은 밀폐된 공간에 놓여 있다. 비인간적 공간은 하나의 미로처럼 출구를 예시하지 않고 있다. 육중한 구조체의 수직성은 더욱더 상황을 차갑게 하는데 일조한다. 차가운 구조체 속에서 인간은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환경 혹은 상황과의 부조화. 그렇기 때문에 소외라는 부산물이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
오원배의 작품은 특정한 명제가 없다. 굳이 들라면 [무제]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특정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작품제목을 쉽게 부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특정 제목을 거부하고 있다. 그만큼 작품의 기저에 깔리고 있는 주제의식이 확실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그의 주제는 현대사회의 인간소외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같은 전제 아래 몇몇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1998년 4월]이라고 서명된 3폭의 캔버스 작품은 밀폐된 실내의 특정상황 속에서 참담한 인간상이 설정되어 있다. 부감법처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은 암울함 그 자체일 따름이다. 구석의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계단 위로 올라서 보지만 절망의 뿌리는 어쩔 수 없다. 오히려 급박한 상황임을 암시할 다름 이다. 그의 뒤에는 걸상이 쓸어져 있다. 허술한 공간, 출구가 있는 것 같은 상황 그러나 인간은 절망의 시간만 끌어안고 있다. 비정상의 세월이다. 작가는 분명히 IMF사태 이후에 이 작품을 제작한 것 같다. 아마 실직자의 터전인 공원과 역 대합실이라도 둘러보고 붓을 들은 것 같다. 불안정한 오늘의 상황이 상징적으로 묘사된 그림이다.

고가도로 아래의 동상은 견고한 작품이다. 작가의 저력이 듬뿍 담긴 그림이다. 청계천 같은데서 쉽게 볼 수 있는 고가도로의 구조가 적나라하게 들어 나있다. 무엇인가 불안감 같은 것이 엄습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위치가 아닐 듯 싶은 동상 하나가 불안정한 자세로 서 있다. 그러나 그 인물상은 두 팔목이 절단되어 있다. 불구로서의 현대인, 작가는 도 다른 방식으로 현대사회의 단면을 조형적으로 증거 하려는 것 같다. 구성과 색채 등 짜임새가 잇는 수작이 아닌가 한다.

[응시]라고 제목을 달고 싶은 작품은 어떤 구조체 아래서 땅바닥의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여섯명의 청년을 그린 것이다. 역시 그들은 삭발하고 있으며 상체는 나신이고 하체는 몸에 꽉끼는 바지를 입고 있다. 불안정 속에서도 무엇인가 예비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신체의 선이 분명하게 처리되어 특히 그렇게 느껴진다. 배경의 횡으로 뜯어 낸 테이프 자국은 긴장감의 화면에 변화를 주고 있다. 또 어떤 그림은 누워서 역기 들기하는 청년상을 묘사하고 있다. 운동하고 있는 사람보다 오히려 구경하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더욱 지지한 모습이다. 이 작품은 아마도 암울함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청년세대의 의지를 담으려 한 것 같다. 때문인지 작가는 화면의 중앙부분을 알루미늄판으로 부착하여 강인함을 함유시켰다. 또 다른 작품은 계단이 있는 거대한 건축물 아래서 기마전 놀이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여지껏의 오원배 세계와는 차별상을 느끼게 한다. 소외의식 속에서도 긍정적 세계에의 애정 어린 눈길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날고 싶다, 높이 날고 싶다]같은 작품은 새로운 세계를 예시 해주고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사실성을 담보한 묘사력으로 경쾌하게 비상하는 청년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활달한 필치로 담은 젊은 기상은 무한한 약동을 공유하게 한다. 이 같은 효과를 의식했는지 작가는 드로잉하듯 편안한 필치로, 그것도 목타난 가지고 제작했다. 웬만큼 용기가 없으면 완성작이 아니라고 출품도 생각하질 않을 것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작가 의도는 애초의 출발선부터 차별상을 갖게 했다.

오원배의 신작에는 꽃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예전과 다른 부분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꽃이 꽃 같지가 않은 것이다. 꽃하면 당연히 예쁜 것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의 꽃은 다소 괴기스럽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여 편안하게 음미할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꽃그림마저 참담한 사회의 소외된 인간상과 동등한 시각으로 그렸음을 알게 한다. 이그러진 사회에서 작가는 아름다운 꽃조차 아름답게 볼 수 없는 처절함(?)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꽃은 하나의 키치이기도 하여 상투화된 도상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시도했다.

화투에 나오는 도상을 차용하여 인생의 거울로 비유하기도 했다. 인생은 도박과 같은 것이라고. 암울한 시대의 꽃, 그 꽃 마저 아름답게만 감상할 수 없게 하는 척박한 세월. 작가는 꽃마저 마냥 아름답게 그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꽃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의 이그러진 인간 군상을 본다. 꽃 그림의 소품에서는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소도구들이 적절하게 활용되어 아기자기한 맛을 제공하는 멋도 부렸다. 오원배의 작품은 유화 물감 대신에 수성의 안료가 사용된다. 유화물감 대신에 그가 안료를 애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품 표면의 반짝거림을 체질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표면이 반짝거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의 깊이감을 더해 준다. 또한 그의 작품주제인 소외 혹은 암울함 같은 것의 표현효과와도 합치된다. 특히 수성 물감은 유화 재료에 비해 빨리 마르기 때문에 제작 상 편리함도 있다. 이 같은 수성 물감 가운데 그는 무거운 무채색계열을 선호했다. 무채색 역시 그의 주제의식과 합치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오원배의 세계는 암울한 시대의 소외된 인간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의 미래를 향한 극복으로서의 자기확인 작업이다. 소외의식을 깊이 통찰하는 자만이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