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13] “도시속 소외된 人間 사랑 그렸죠” - 김한수(1997)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1997년 11월 8일 조선일보 , 김한수 기자

/술 좋아하고 우직스런 최연소수상자/
/프랑스에 세차례 머물며 작품깊이 다져/
/“앞으로 도시보다 자연 담을 생각”/

『수상소식을 듣고 정신이 멍해 학교(동국대) 법당에 가서 한참을 앉아있다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큰 상을 받는다는게 개인적으로 굉장한 명예이지만 자칫 멍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무척 책임감을 느낍니다.』
제9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서양화가 오원배(吳元培?44?동국대 교수)씨는 수상소감 첫마디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중섭미술상이 제정된 이래 최연소수상자인 오씨는 진지함을 넘어 때론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는 화가다. 초면에 농담도 못할 정도로 낯도 가린다. 그렇지만 작업에 대해선 철저하다. 술을 좋아하지만 캔버스 앞에만 서면 지금도 긴장이 되고, 아무리 만취해도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학교 작업실의 캔버스 앞에 선다.

지금까지 그의 작업은 쟂빛 가득한 화면 속에 다 쓰러져가는 낡은 아파트가 서 있고 그 중심엔 푸른 빛 벌거벗은 사람들이 무엇을 짊어지고 나르거나 레슬링을 하듯 힘든 포즈로 있다. 절로 「수고하고 짐진 자들」이란 생각이 드는 그림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실존문제와 소외를 우직하게 그려왔다. 작품 속 등장인물의 고통스런 동작들은 오씨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주제를 풀어가는 방법은 최소한 2백호가 넘는 대작들이다. 그는 『각각의 그림엔 주제에 맞는 크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제는 그림이 크지 않고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목도 없다. 화면 구석에 그때 그때의 심경을 담아 「우리의 거인은 무엇을 꿈꾸는가」「잃어버린 한여름밤의 꿈」등 몇 자씩 긁적거릴 뿐이다. 어두운 색조에 크기까지 엄청나다보니 그는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드물었다. 86년 귀국한 후로 11년 동안 개인전은 4번밖에 열지 않았다. 마지막 개인전은 92년 조선일보 주최 「올해의 젊은 작가」로 선정돼 그 이듬해인 93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가진 기념전이다.

내면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을 열면 만5년만에 조선일보미술관에서만 연달아 개인전을 갖게 되는 셈이다. 오씨는 동국대를 졸업한 후 지금까지 세 번 프랑스에 머물면서 작품의 깊이를 다져왔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비롯,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면서 두 번 더 파리를 다녀왔다. 파리 유학중에는 프랑스 사람들도 힘들다는 파리 국립미술학교 회화 1등상(84년), 프랑스 예술원 회화 3등상도 받았다. 그는 『뭔가 자극이 있는 곳이 파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떠나지 않으면 어느덧 타성에 젖어버리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는 게 그의 얘기다. 파리에 가면 그는 작업실에 전화도 놓지 않고 그림만 그린다고 한다. 95년 가을부터 1년간 파리에 머물 때도 그렇게 지냈다. 그 결과 두툼한 스케치북 30권을 「해치웠다」.목탄에 물감을 칠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기도 했고, 풍경도 사람 얼굴도 그려보았다.

그런 실험이 쌓이기에 그에게 파리행은 곧 작품의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내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가질 수상기념전은 95~96년 파리생활의 결산이 될 전망이다. 이번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오씨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도시보다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업실에는 어른 키를 넘기는 대형화면에 꽃이 피어있는 정원을 그린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이란 작품이 오씨의 마무리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오씨는 『저보다 훨씬 뛰어나고 진지한 작가들이 많은데 젊은 나이에 이렇게 큰 상을 받은 만큼 더욱 남에게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