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09] 수난기의 풍경화 - 김현도(1994)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단행본: ART VIVANT contemporary korean artists (시공사)
리뷰: 수난기의 풍경화
글 : 김현도(미술평론가)

뭐 거창한 역사 의식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난 십 수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를 돌이켜 볼 때, 결코 헤어날 듯 싶지 않던 정치사의 어두운 흐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일종의 여명기로서 정치 사회적인 명암이 엇갈리는 시기에 처해 있다. 도대체 상식선의 합리성과 도덕률조차 무시되고 이른바 폭력의 논리만이 현실성을 지녔던 암흑기를 돌아보는 일은 유쾌한 일이 아니겠지만 그것은 신분과 계층, 세대와 직종에 따라서 그 감회가 각기 다를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일반론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같은 시기의 오원배의 그림을 돌아보는 이 자리에서 지난 정치사의 문제로 서두를 삼는 것은 그러한 정치적인 비극이 그의 회화 세계와 무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방 전후 한국사회의 정치적 동요와 아울러 문화예술에 있어서 순수지향성과 참여론 사이의 긴장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문화예술의 현실성에 대한 논리로서 양극의 입장으로 첨예한 대립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사회성을 투영하게 마련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극단적인 순수지향조차 사회현실에 대한 나름의 예술적 입장표명이라는 점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은 지난 십여 년간 예술성의 표현형식에 대한 정당성을 고려하기 이전에 그간의 사회 문화적 분위기가 예술의 본질에 작가의 역량을 집중시키기에는 너무나 큰 현실적 장애로 작용했었다는 사실인식의 문제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사회적 자유와 정의가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개인의 예술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회의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기왕에 예술의 길을 선택한 젊은 작가들의 감수성으로 하여금 예술사의 흐름과 예술자체의 본질을 고뇌하는 일과 더불어 늘 이중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였다. 그것은 일종의 딜레마였다. 진정한 작가라면 누구나 부당한 사회현실에의 개입과 참여가 예술적 표현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일과 막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생활을 시작했던 ‘70년대 말, 오원배는 주로 탈을 그렸다. 탈은 그 자체로 이중성의 상징이다. 그것은 실제의 표정이 가려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이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알린다. 탈을 쓴다는 것은 구속인 동시에 자유이다. 탈의 간접성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의 표현은 자기외적으로 발산되기도 하며, 반대로 그것은 자기노출을 은폐하는 보호막으로 작용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탈은 숨김과 드러냄을 동시에 호흡하는 변장의 피부이다. 그것은 자기일탈의 자유와 자기억제의 구속을 동시에 성취하는 모순적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탈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한국의 문화상황에서 젊은 작가들의 처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상징물이 된다. 그것은 정치적 입장과 예술적 취향 사이의 갈등은 물론이고, 참여와 순수, 실제와 허구, 추상과 구상, 회화적 평면성과 삼차원적 일루전 사이에서 동요를 일으키는 작가의 입장을 단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아마도 이 시기의 오원배의 그림에 우리가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같은 갈등 구조의 시대성이 우리의 가슴에 먼저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오원배의 화력에 있어서 회화적인 자기모색이 느껴지는 이 시기의 작업에 있어서도 하나의 시대적 정직성이 표출되고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그가 지닌 주제의식의 매우 튼튼한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82년의 체불 이후에 오원배는 드디어 탈을 벗어 던진다. 어차피 가면이 그 이면에 대한 호기심을 전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탈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는 단계로 초대되는 셈이다. 파충류와 같은 인간의 몸뚱이가 칠흑같은 배경 속에 내던져져 있다. 욕망의 상승과 하강을 암시하는 계단과 사다리. 안정과 평온을 상징하는 기둥과 의자들이 온통 전복되어 현실적인 맥락을 잃고 있다. 가면은 다소 투명해졌다. 탈은 이제 안경으로 대치되기도 한다. 감시하는 사람도 감시당하는 사람도 똑같이 안경을 쓰고 있다. 인체의 동요는 비현실적인 위치에 고정된다. 검은 안경을 쓴 생물이 그들의 사지 어딘가를 잡아챈다. 그의 이마에 뿔이 돋아나 있다. 악몽과 같은 사태, 하지만 ‘80년대를 살아온 한국인이라면 그것이 한낱 허상이 아니라 실제의 사실과 다름없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일단 오원배의 그림을 마주할 때 느끼는 첫인상은 그의 그림이 눈에 보이는 현상의 미의식을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태를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윤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술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거스르고 있다.
오원배의 그림에는 어떤 미적 형식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난 다. 한 시기의 사회 문화적 현실이 작가에게 피치 못할 주제의식을 심어놓았을 때, 여타의 문제는 자명하게 남는다. 주제의 심도와 비중이 예술적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므로 언 제나 작가에게는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더 절실한 문제이다. 지난 십 수년간 오원배의 그 림들은 그러한 고뇌의 궤적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우선 그는 그림 그리기-붓과 물감, 그리고 평면-라는 전래의 형식을 벗어난 일이 없다. 청년기의 시대상황이 그에게 후험적 당위로써 단일한 주제를 던져주었다면 전통적 회화형식에 대한 고집은 아마도 그의 선천적인 기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변화를 싫어한다기보다 그것이 가볍게 표피적으로, 마치 유행에 편승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모호한 방법적 차용으로 변화를 꾀하기보다는, 변화는 치열한 조형의식의 시행착오를 통한 극복의 논리를 가져야 한다’고 썼다.
그는 다분히 경험주의자이다. 체험의 육화가 철저히 내면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미적 형식으로 표현되기는 어렵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론 각고의 인내와 고통을 전제로 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그림은 이 같은 인내와 고통의 역동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강한 상징성과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

또 그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은 나의 생활중 주요 부분이다. 미처 발길이 닿지 못했던,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훑어보기도 한다.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내게 신명나는 일이다. 습관과 관성 속에서 쉽게 인지될 수 있는 공간을 떠나 새로운 환경을 접해보면 우리 주변의 일상들이 문득문득 작업의 소재로도 떠오른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소재들은 그저 화가의 주변에 널려 있을 법한 범속한 사물들과 알몸뚱이의 인체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작가의 내면에 투영됨으로써 상투적인 외양을 벗는다. 최소한의 의복과 겉 피부마저도 지워진 사람들, 기울어진 벽과 기둥과 연통, 전복된 의자와 사다리, 어둠 속에 느닷없이 떠오른 번호와 글자, 작가는 이들의 평범한 차원을 뒤짚어 엎고 해체하고 파괴하고 다시 끌어안는다. 모종의 괴력에 의해 변형된 세계, 그곳에는 정상적인 중력이 작용하지 않고 법과 질서가 붕괴되어 있다.
이 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한동안 사각평면의 가장자리를 깨뜨리는 실험을 계속한 일도 있다. 얼핏 보기에는 허구적이며 작위적이고 심지어 역겨운 광경으로 여겨지는 이 세계는 그러나 보면 볼수록 역설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피상적인 삶의 이면에 실재하는 고통스런 생활의 단층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직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상사의 한 단면을 제시하는 것이므로 역겹기는커녕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원배가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믿고 그가 그려내는 세계를 자신있게 리얼하다고 느끼고 있는 근거일 것이다. 그는 ‘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폭력의 환경을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화폭 위로 옮겨놓았다. 여기서 인간은 인간다운 자유를 잃고 사물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부유한다. 이 장면들을 추악하게 느끼거나 외면하는 우리들은 아마도 이보다 더한 현실 앞에서도 동일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을 것이다.

오원배의 그림들은 참혹했던 현실과 더 비참해질지도 몰랐던 미래 앞에서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수난 받던 시절의 내면적 풍경화이다. 물론 그의 작업이 한 시대의 실제적인 풍경으로 여겨지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의 그림들은 투지와 참여와 분노의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억압과 소외와 죄의식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읽혀지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 동시에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읽혀지는 이종의 복합상이며, 그럼으로써 오히려 보편성을 얻고 있다. 그의 회화들은 끊임없는 표현에의 순수한 열망과 고통스런 현실의식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최근 삼 년간, 그의 고통받는 인간 연작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정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픔과 분노의 피질들로 뒤덮여 있던 사람들의 형상은 마치 영혼을 암시하는 듯한 청색조의 선묘로 바뀌어 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 대신 나즈막한 신음, 또는 고즈넉한 침묵, 심지어 그들의 손에는 관악기가 쥐어져 있기도 하다. 사다리는 기어올라가도 좋을 만큼 안정되어 있고 의자들도 이제는 앉을만한 각도를 유지하고 있다. 칸막이와 벽면들도 ‘80년대에 그려진 것처럼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미궁이 아니라 진로를 찾아낼 수 있을 법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우리는 앞으로 그의 작업에서 어떤 희망의 징표를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도 있다는 예감을 갖게 된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부단한 자기정화의 의지야말로 지난 십여 년간 오원배가 그림을 그려야했던 내면의 원동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아란 결국 인연의 합성체이며 그것은 부단히 탈피되거나 연마되어야 할 성질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오원배의 작업은 마치 파충류가 벗어낸 허물처럼, 우리의 사회 문화적 변화를 입증한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문화적 공감대를 구성하는 하나의 지표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마치 지난 십여 년간의 르포르타주 사진이나 다큐멘타리 필름이 당시의 참혹했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듯이, 우리는 오원배의 개성적인 작업을 통해 회화 형식으로 된 일련의 귀중한 증거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그리고 또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지난날을 목격했던 그의 진실함 힘으로 이루어질 우리 앞날의 풍경화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던 정치 사회적 여명을 내면화하고 외재화시키는 우리 자신들의 부단한 변화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