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20] 치유될 수 없는 ‘소외’… 이젠 끌어안는다 - 정재연(2003)

October 23rd,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미술] 5년만에 개인전 여는 오원배 교수
/치유될 수 없는 ‘소외’… 이젠 끌어안는다/ 2003. 10.14, 조선일보 정재연 기자

키 큰 캔버스, 키 큰 사다리가 놓인 키 큰 작가의 백색 공간. 천장 높이가 6m에 이르는 동국대 미술학부 교수 연구실은 오원배(50)씨가 긴 팔을 죽죽 뻗으며 1500호짜리 대작에 매달리는 곳이다.
개인전(23일~11월 2일 금호미술관)을 앞둔 오 교수 연구실을 찾아가 보니 한쪽 벽에 은색으로 밑칠만 해 놓은 화면이 붙어 있다. 다른 작품을 모두 완성한 작가가 마지막으로 ‘자, 이제 무엇을 그릴까’라며 매일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미지의 캔버스다.

한창 활동 중인 요즘 작가치고 오원배씨만큼 전시가 드문 이도 있을까. 그룹전이야 수십 차례에 이르지만 국내 본격 개인전은 5년 전, 제9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기념전이 마지막이었다. 그에게 전시회란, 시대 분위기를 깊이 빨아들여 조형세계로 승화시킨 다음 날숨처럼 길게 뽑아내는 자리다.

작가들마다 평생 매달리는 주제가 하나씩 있다면, 그의 경우는 바로 ‘소외’다. 197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작가는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암울했던 시대상을 캔버스로 옮겼다. 갈비뼈 드러나도록 비쩍 마른 몸뚱이들이 머리에는 탈바가지를 뒤집어 쓴 채 뒤엉켜 있는 그림은 야만과 폭력의 시대를 고발하듯 강렬하다. “당시에는 누드·풍경화·꽃 그림, 혹은 모노크롬(단색조 회화)이 대세였지요.” ‘이건 아니다’ 싶어 유학을 생각한 작가는 1980년대 초 표현주의, 그리고 평면회화의 힘에 기대를 걸며 미국이 아닌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1990년대까지 오씨의 그림은 암울했다. 화면에 등장한 거대한 구조물은 푸르스름한 인체를 내리누르듯 위압적이다. “성장 제일주의가 남긴 콘크리트 구조물로 봐도 됩니다. 아파트·고가도로·육교·다리…. 인간을 억압하는 현대판 미궁이기도 하지요.” 차갑고 어둡고 음산한 작품, 축축하고 눅눅한 습기를 뿜어낼 듯한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각자 ‘나를 찍어누르는 상황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2003년. 그의 작품에는 과거 그림에 자주 등장하던 웃통 벗은 청년들이 다시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트럼펫·바이올린·튜바 등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아직 소외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울분과 탄식은 아닙니다.” 오씨는 “소외의 문제에 밝게 접근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모순적이지만 그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소외는 치유될 수 없어요. 소외는 인간 조건입니다. 가진 자건 못 가진 자건, 강자건 약자건 누구나 소외돼 있어요. 이제는 이를 끌어안고 가자는 겁니다.” 오씨는 “과거에도 합주의 이미지를 그렸다”며 “당시 소리를 낼 수 없었던 처절한 소외를 그렸다면, 이제는 일상이 된 소외 속에서 각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씨는 완제품 물감 대신, 그 이전의 상태인 안료를 캔버스에 발라, 반짝거리는 윤기를 싹 없앤 채 드라이 하면서도 묵직한 깊이를 추구한다. 소외란 단어는 이제 진부하고, 인간은 당연히 외롭지만 쇼는 계속돼야 하는 현실을 그림의 힘으로 풀어내는 작가에게 어울리는 재료다. 신작에는 예의 그 구조물도 등장한다. 그러나 더 이상 흉물이 아니다. 그림 속 미로는 따라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이다. “이제는 희망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지난 번 가보니 청계 고가도로도 사라졌더군요.” 소외란 주제를 즐겁게 짊어지고 가는 작가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