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3/3] 오원배 개인전 (2007)

October 21st, 2007 Posted in Recent Article(2007)

오원배 개인전
아트싸이드 2007. 5. 2-15
양정무(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표현 아닌 예술은 없다고 하지만 오원배 만큼 자기표현에 철저한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30년 넘는 그의 화력(畵歷)은 일관되게 현대 사회 속에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의 실체를 좇고 있다. 현대 문명 속에 감춰진 어두운 인간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주변의 예측을 이번 전시도 ‘아직은 아닙니다’며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 도리어 사회적 폭력의 형태가 교묘하게 변화하듯 그의 대응은 예전보다 정교해질 따름이다. 현실참여를 표방한 작가들조차도 두 손 들고 떠나간 불모의 땅에서 계속적으로 자기 표현적 영감을 공급받는 그의 예술적 특이 체질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번 <아트싸이드>에서 열린 개인전은 그의 집요한 표현주의적 주제의식과 함께 2003년 <금호미술관> 전시나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으로 1998년에 열린 전시에서 시도한 회화적 실험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리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주었다. 오원배는 회화 매체에 대한 탐구를 또 하나의 주요 과업으로 삼아 오면서, 매번 안료나 캔버스 형태 등을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이 점은 앞서 그를 평가한 여러 글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났지만, 아직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에서는 합의를 보지 못한 듯하다.

앞선 전시에서 필자는 뜬금없이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중부내륙에 그려진 벽화들을 연상했었다. 등신대가 넘는 크기의 군상, 배경에 자리한 건축 구조물, 간략하고 압축적인 필선, 거칠고 메마른 화면 효과까지 적잖이 토스카니 지방의 오래된 벽화들을 환기시켰지만, 이 느낌을 르네상스 회화에 탐닉한 필자의 개인적 판타지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프레스코 기법을 적용한 작업이나 원근법이 오원배의 화면에 본격적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이제는 나의 회화적 독법에 자신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 그의 회화적 야심을 좀더 체계적으로 되짚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선보인 대규모 작업에서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벽화를 연상시키는 특징을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벽화적 특징 위에 인체를 다양한 시점에서 파악하려는 시도가 더해졌는데, 단축법(foreshortening)으로 잡아낸 인체를 둘러싼 어눌한 드로잉까지도 르네상스 시기 벽화를 신기하게 닮아 있다. 그의 작업은 부분부분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의 [대홍수](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나 피렌체 대성당의 예언자 프레스코, 또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아담의 죽음](아레조 산 프란체스카 성당)과 비교된다. 

뿐만 아니라 재료적으로도 과거와 더 친밀해졌다. 오원배는 오래전부터 튜브물감 대신 안료 가루와 수성용매를 섞어 사용해왔는데 이번에는 그만의 물감이 거친 종이 위에서 펼쳐지면서 갈필의 메마른 느낌이 더 강해졌다. 대작에는 본격적으로 시도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소품에는 중세 프레스코 기법을 직접 이용한 작업을 시도한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이러한 화면 효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어렵지 않게 가늠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오원배가 제시하는 세계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사실 르네상스 화가들은 근대 시민사회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부르주아 인간의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몸을 내세우는데 거침없이 당당했고 주변세계는 인간에게 철저히 종속되었다. 반면 오원배의 화면은 아이러니컬하게 한 때 세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들의 마지막을 알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오원배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희망찬 시작과 허망한 말로를 강하게 대조시키기 위해 유사한 시각 조건의 복원을 희망했는지 모른다. 시민계급의 활력을 잡아내기 위해 르네상스 화가들이 장대한 화면을 사용했다면, 오원배는 그들이 종국에 직면한 절망을 강조하기 위해 대규모 화면을 필요로 했다. 전자에서 원근법이 세계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후자에 분절적으로 도입된 원근법은 화면을 불규칙적으로 만들어 불안감만을 고조시킬 뿐이다. 전자에 드러난 인체는 넘치는 에너지로 주체할 수 없어 용트림하고 있지만, 후자에서는 초점을 잃은 체 허망하게 방황하고 있다. 전자에서 신과 이성으로 무장한 신인류의 힘을 느껴 볼 수 있다면, 후자에서는 문명의 끝자락에서 서서 방황할 자유밖에 주어지지 않은 실존적 인간상을 대면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그려야할 서사(敍事)가 있었지만 오원배에게는 방황 이외에 아무것도 그릴 것이 없다.

비극이다. 오원배의 작업은 일찍부터 문학과 연관되었다. 그의 7-80년대 작업은 암울했던 군부독재·개발독재 하에 짓밟히고 무너진 <꼬방동네 사람들>이나 <어둠의 자식들>의 초상으로 읽혀졌다. 괴기스런 탈, 짐승-인간, 유령 같은 군상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그의 전시에 등장한 인물은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몸을 가지고 있어 그가 제시하는 비극의 논조에 변화가 감지된다. 심지어 살 위에 금분(金粉)까지 곱게 입고 있어 밝은 조명 하에 맑게 몸을 드러내 준다. 작가가 불가(佛家)에 심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이 대목에서 종교적 승화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러한 효과가 혼돈스런 몸짓과 암울한 배경과 어우러져 화면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비극적 구조를 심화시키기 위한 전환으로 밖에 읽을 수 없다. 선하고 아름다운 인체가 겪는 고통에 우리는 더 쉽게 몰입하게 된다. 가해자도 될 수 있고 피해자도 될 수 있는 다중적인 인체가 비극으로 치달을 때 더 많은 관객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의 발전은 ‘아폴로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 나아가 그 둘의 양성 교접에 의존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중성을 빌러 오원배의 비극적 서사를 분석해 보자면, 그의 앞선 전시는 어두운 광기의 <디오니소스>에 치중했지만, 이번 전시는 여기에 이성과 환희의 <아폴로>을 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폴로의 등장 덕분에 그의 어두움이 더 역설적으로 강조된 것은 물론이다.

아마도 극적 대비와 포용을 더 강조하기 위한 이중적 구조를 짜내기 위해 오원배는 신체에 가한 조작 외에도 더 다양한 보강 장치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이번 전시에도 악기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단, 합주는 사라지고 조용한 독주만이 살아남았는데, 쾌락을 암시하는 악기 외에 생식과 찰나적 즐거움을 상징하는 꽃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앞서 언급한 비극의 이중구조를 화면 속에서 더 명확하게 짜내고 있다.

요즘 영화계는 ‘작가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원래 이 용어는 영화를 감독 개인의 결과물로 분석하려는 영화 비평의 접근법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대중 기호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감독 개인의 스타일을 강조한 영화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되는 듯하다. 최근 미술계의 경향이 다분히 현실 순응적이라고 진단할 때, 이 같은 영화계의 ‘작가주의’라는 용어를 빌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한번쯤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한다. 특히 요즘 전시장을 다니다 보면 일상에 대한 가벼운 재해석으로 잔잔한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평면 작업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여기서 적지 않은 감동을 얻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뼈 속까지 저며 드는 울림 있는 작업을 보고 싶은 욕구도 아울러 생겨나곤 했다. 오원배의 이번 전시는 여러 면에서 회화가 인간의 실체를 어디까지 비출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를 통해 실로 오랜만에 시각적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 있었는데,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나 그의 집념을 ‘작가주의’라고 불러도 될 듯싶다.

오원배는 그간 4년 또는 5년 단위로 개인전을 열어 왔다. 개인전이 무슨 월드컵이나 올림픽도 아닐 터인데, 그는 지나치리만큼 자신을 드러내는데 소극적이었다. 이제 그의 작업방향이 세상에 분명히 드러난 이상 별로 숨길 것도 없지 않은가. 이젠 좀 더 빠른 템포로 그의 작업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