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19] 끊임없는 붓질, 삶의 나이테 - 이기선(1999)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미술세계, 이기선(미술사), 1999

1. 삶

오원배는 인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서울의 입구인 인천은 강화도조약(1876)으로 쇄국의 문을 열고 개화의 물길을 틀 대 부산, 원산과 더불어 처음으로 열린 개항장이다.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간혹 그 역사적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꼽는다면 이른바 청관거리이리라. 화교들이 모여 살던 이곳에 가면 지금도 옛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데 그의 어린 시절에는 제법 활기가 있었고 어린 그의 눈에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기도 했으리라. 제 또래 또는 한 두살 위로 보이는 ‘꾸냥’에게 설레이는 마음을 지닌 채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미술반 실기실에서 몽둥이짐질을 당하면서도 짓궂은 선배의 잔심부름을 견디어 내야 했다.

오늘날의 ‘학원폭력’과는 성격이 달랐으며, 써클 활동이 보편화되었던 그 시절 누구나 겪었던 일로 선후배간 혹은 같은 피해자로서의 동료의식을 굳게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폭력은 폭력이고 졸개로서 느껴야 했던 비굴함은 감성이 여린 사람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상채기가 가슴 한구석에 남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도 상급학년이 되어서는 ‘졸개’를 데리고 용유도를 비롯하여 인근 섬으로 여름캠핑을 가기도 하였다. 섬에서의 야영생활을 통하여 학교와 가정이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맛보는 것은 당시로서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뒷날 그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은 나의 생활 중 주요부분이다. 미처 발길이 닿지 못했던,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훑어보기도 한다.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내게 신명나는 일이다. 습관과 관성 속에서 쉽게 인지될 수 있는 공간을 떠나 새로운 환경을 접해보면 우리 주변의 일상들이 문득 문득 작업의 소재로 떠오른다”고 털어놓기도 하였다.(김현도, [수난기의 풍경화] [아르비방(art viant)], 시공사,1994) 바다와 배는 매우 친근한 까닭에 스케치의 주된 대상이었다. 그때의 추억이 담긴 스케치북을 70년대 후반가지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펼쳐 보았는데 아마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리라. 바다와 배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모험심 그리고 그 꿈을 펼쳐 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영글어 파리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은 아닐까.대학에 들어가서 서울로 통학하여 그 생활반경이 넓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삶의 터전은 바다가 있는 인천이었다.

기차를 이용한 통학 길은 그에게 현자영험의 산 교육장이기도 하였다. 동인천에서 제물포, 부평, 소사, 오류동, 구로, 영등포, 노량진 등을 거쳐 서울역에 이르는 경인선의 차창에 비친, 아니 그가 매일 등. 하교길에서 차창 너머로 바라본 것은 바로 급변하는 1970년대 우리 현대사의 현장이었다. 복숭아나무가 베어지고 봄에는 초록빛 가을에는 황금빛이 물결치던 논밭이 사라지고 잿빛의 건물이 자리잡으면서 높다란 굴뚝에선 매케한 검은 연기가 푸른 하늘을 덮어갔다. 어디 자연뿐이랴.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으로 상징되는 가난과 궁핍 그리고 고향을 더나 도시의 변두리를 떠도는 타의의 실향민. 무엇인가에 쫓기듯 앞만 보면 달려가는 우리 이웃의 얼굴에는 고단한 삶의 앙금이 고여 가고 최루탄의 매운 연기는 가득이나 아픈 사람들의 가슴을 절망케 하며 메마른 눈에 억지 눈물을 훔치게 하였다. 드가가 말했던가. 데생은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젊은 오원배는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그렸다. 아니 그린 것이 아니라 가슴에 저절로 새겨졌을 것이다. 대학3학년을 마치고 그는 1974년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입대한다.

교육훈련을 마치고 그가 배치된 곳은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부대. 남북분단의 상징으로 동서를 가로지른 155마일의 철책선 한 부분을 지키게 된다. 대한민국의 건전한 사내라면 피할 수 없는 국방의 의무. 하지만 70년대 중반의 최전방부대에서 겪어야 하는 3년간의 사병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획일화된 유니폼처럼 모든 것이 경직된 사회. 그리고 반복되는 내무생활과 구타, 첩첩이 에워싼 산 그러나 말없는 그 산들이 그에게는 숨통을 터주고 그에게 무언의 일깨움을 주었다. 바쁜 틈을 쪼개어 그리고 고참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꾸 굳어 가는 손과 의식을 편지 쓰기와 크로키에 가까운 스케치를 통하여 자신을 담금질하였다.

그가 내게 보내온 편지는 산내음이 싱그럽게 풍겼다. 하얀 종이 위에 꾸불거리는 독특한 흘림체의 검거나 푸른 한글필체 그리고 간혹 곁드려지기도 하는 선묘, 게다가 간결하면서도 아취 있는 그의 글-서술형의 논리적 문장이 아니라 시의 한 구절 같은 그의 담백한 문체는 지금 읽어도 늘 새롭다. 타의에 의해서 주어진 혹독한 환경과 생활, 결코 짧지 않은 3년의 시간은 분명 인고의 세월이었지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기도 하였다.

4학년에 복학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이 기간동안 대학의 조교를 거치기도 하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이력에서 더 주목되는 것은 생활의 터전이 인천에서 개봉동으로 옮겨지고 집 가까운 곳에 그의 작업장을 마련한 일이다. 그 당시 화실을 찾아가면 화실 옆 포장마차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는데 나는 말끝마다 ‘개봉동시대’가 열렸다고 말하곤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 화가로서의 삶을 새삼 다짐하며 본격적인 창작에 열중한 시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남몰래 파리 유학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진행한 기간이기도 할 것이다.

2. 유학

1982년부터 1985년 가을까지 파리 국립미술학교(에꼴 데 보자르)에서 보낸 3년여의 유학생활은 화가로서의 공적인 활동에서 보든 오원배 개인의 사적인 삶의 측면에서든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그런데 필자의 개인사정으로 그 기간 동안 그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을 뿐 나는 한 줄의 답장도 보내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깝다. 뒤늦었지만 그와 함께 그가 노닐고 공부하던 현장을 찾아 그가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어떻게 생각이 바뀌어갔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오병욱의 [작품의 완성을 위한 주제와 형식의 교섭](1993.5.21~5.30[조선일보]주최 <올해의 젊은작가-오원배초대전> 전시도록에 실린 평론)이나, 최태만의 [동요와 불안의 군상]([가나아트]1989.5.6월호) 등의 글에서 어느 정도 소개되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기약하고자 한다.다만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회화 1등상(1984년)과 프랑스 국립예술원 회화3등상(1985년)을 수상하고, 파리 국립미술학교와 프랑스 문화성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파리 화단에서도 작가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그가 1985년 가을에 돌연 귀국하게 된 연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하여 귀국하여 장례를 치루고 난 뒤 뜻하지 않은 노모의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끝내 파리로 돌아가는 기회를 놓치고 만데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짐작할 뿐이다.

3. 작품세계

“개인전과 여러 기획전. 그룹전을 통하여 과감하고 끈기 있게 자신의 독자적인 스타일의 창출과 그것에의 확신, 그 위에 또 다른 가능성과 변환을 시도해온 오원배”(정영묵, [인간과 구조간의 긴장관계-실존의 상황을 위한 오원배의 조형성]중에서, <오원배전> 갤러리 서미, 1992″오원배의 작품에서는 무엇인가 문학적인 주제가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회화적으로도 풍부하다.”(오병욱, [주제와 형식의 교섭]중에서)”…그가 그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다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 일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인간 일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며 실천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 항상 표현되고 있는 갈등과 대립 역시 인간의 역사와 사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작업실의 저 폐쇄적 공간 속에서 배양된 심리적 상흔에 가깝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최태만, [동요와 불안의 군상]중에서)”
우선 그는 그림 그리기-붓과 물감, 그리고 평면-라는 전래의 형식을 벗어난 일이 없다. 청년기의 시대상황이 그에게 후험적 당위로써 단일한 주제를 던져주었다면 전통적 회화형식에 대한 고집은 아마도 그의 선천적인 기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변화를 싫어한다기보다 그것이 가볍게 표피적으로, 마치 유행에 편승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에 반대한다.”(김현도, [수난기의 풍경화]중에서)”오원배의 작품은 유화 물감 대신에 수성의 안료가 사용된다.

유화 물감 대신에 그가 안료를 애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품 표면의 반짝거림을 체질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표면이 반짝거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의 깊이감을 더해 준다. 또한 그의 작품 주제인 소외 혹은 암울함 같은 것의 표현효과와도 합치된다.”(윤범모, [오원배의 신작 혹은 소외된 현대인의 초상] 중에서, <제9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 오원배전>,1998]지금까지 발표된 오원배의 작품론 도는 작가론 가운데서 글쓴이가 임의로 발췌한 내용을 나열해 보았다. 이 발췌된 내용은 글쓴이의 입장에서 대체로 공감하거나 작가 오원배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요점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 기질

작가 오원배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도 쉬이 드러내진 않으나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행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스포츠 특히 야구는 광에 가까울 만큼 좋아하며 전문가 수준의 이론과 선수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절제력이 있다.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전통시대 문인화를 즐긴 선비의 기질을 지녔다고 본다. 글은 많이 안 쓰지만 시인의 소질을 지녔다. 그가 전통시대에 태어났다면 시서화에 두루 통한 삼절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으리라.인간은 본디 고독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유가에서는 ‘군자는 홀로 있음을 삼가 한다’고 말한다. 평면과의 치열한 절차탁마 붓질이 계속되어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그런 거목이 되어 줄 것을 믿는다.

거문고 속에 소리 있다면
갑 속에 있을 때 소리 왜 없나
손끝에서 소리가 난다면
그대 손끝엔 왜 소리 없는가.

사족

가까운 거리에서 오랫동안 그의 성실하고 끊임없는 붓질을 지켜보며 느낀 바를 일부 공개하여 보았다. 매우 사적인 이야기일 수 있는 것들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털어놓는 것을 망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가로서 이미 공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자가가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또 그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이다. 이 변변치 않은 글이 도움이 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