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15] 소외된 자들의 삶 - 오병욱(1998)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오병욱(미술평론가)

오원배는 지속적으로 인간을 그려 왔다. 그의 주제는 오래 전부터 변함 없었는데, 그 인간들은 세상의 삶으로부터-자의건 타의건 간에-멀리 소외된 자들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 보이는 탈을 쓴 후줄근한 인간들, 소주병들, 싸구려 꽃들이나 그가 파리 유학 중에 그렸던 짐승 같은 인간들로부터 현재의 인물 군상들에 이르기까지 ‘소외된 자들’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묶여 있음을 본다.

Designe. Dessin. Drawing. 소묘, 이 모두는 말은 다르지만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인 바자리에 따르면, “작가가 착상을 한 후, 그 감지 할 수 없는 생각을 감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정의했는데, 이 정의는 아직도 통용된다. 작품의 90% 완성이 데생이라는 바자리의 주장은 완성품보다 전체적인 착상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미술 양식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도, 작가의 작품이 발전되어 가는 과정도 결국은 작가가 자신의 시대를 살면서 어떤 착상을 하고, 이를 어떻게 실현해 나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오원배의 작품은 이러한 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는 현실에서 착상하고, 그 착상을 구체화한다. 그는 자신의 삶과 주변의 삶을 주제로 삼고, 이를 조형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황폐한 풍경과 황폐한 인간들을 다루고, 최근에는 황폐한 성도 다룬다. 우울한 푸른 인간들, 창백한 인간들은 어두운 70년대를 보냈던 무기력한 젊은 지식인들이면서, 최근 IMF상황 하에서 더욱 무기력해진 인간들이다. 발전과 함께 황폐해진 환경이며, 1백만에 달하는 매춘부들이 있는 성적으로도 황폐해진 오늘이 그 배경이 된다. 오원배는 이러한 주제를 직설적으로 그려 내지 않는다.

소외된 인간은 마네킹 같은 얼굴, 감긴 눈, 가위에 눌린 듯한 경련, 오지 않을 막연한 희망을 꿈꾸는 이들의 무의미한 동작으로 은유된다. 황폐해진 환경은 거칠고 투박한 필치와 갈색조의 어두운 색채로 그려진 폐쇄된 방, 미로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육중하고 위압적인 고가도로와 교각의 형태로, 혹은 알 수 없는 형태들의 출몰로, 공포스러운 검은 배경으로 은유된다.

그의 최근작에 나타나는 꽃은 여성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그는 가식적인 꽃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진정한 사랑 없이도 소유할 수 있는 여성 혹은 거짓 행복이 드러난다는 것처럼 그려내고 있다. 가짜 장미가 장식된 사진들 속의 인물 초상들이 그것인데, 이 초상화들은 나무 틀에 푸른 산과 냇물이 흐르는 풍경을 배경으로 행복한 집이 그려진 ‘그림 같은 집을 짓고’로 상승한다. 황폐한 세계에서의 거짓 사랑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는 늘 시장 바닥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술집에서 두주불사한다. 작품 속의 인간들과 배경은 그 고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나, 그보다는 두주불사하면서도 끝내 취하지 않는 그의 정신이 인간의 주제를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가는 힘의 원천이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