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11] 주제와 형식의 교섭 - 오병욱(1995)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주제와 형식의 교섭(일지사), 오병욱(1995)

순수회화는 조형언어 이외의 것으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의 표현을 의도했다 해도 단지 자가의 내면세계, 그의 감수성 등등 개인적 기질을 부각시키려 하는 데 그치며, 가능하면 문학성 혹은 분명한 주제를 배제하고 또 피한다. 주제가 있는 작품일 경우, 그리는 회화적인 행위가 위축되어 있기 십상이다. 내용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내용의 명령과 지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오원배의 작품에서는 무엇인가 문학적인 주제가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회화적으로도 풍부하다. 그의 작품이 어떻게 이 둘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의 주제 의식과 회화성을 알아봄으로써 그의 거칠면서도 세밀한 균열이 지배하는 대형 화면들이 감동을 주는 그의 작품세계에 접근해 보자.

그의 작품 활동기는 1980년을 전후한 제1시기, 즉 군복무를 마친 후부터 1982년 프랑스 빠리 유학 전까지의 기간, 1982년부터 1985년 가을까지의 빠리 에꼴 데 보자르에서의 수업과 경험확장 기간인 제2시기, 귀국 후부터 지금가지의 제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3시기는 1989년 6월부터 14개월 동안의 빠리 재체류로 끊겨 있지만, 그의 작품 경향과 방향에는 변화를 주지 못했던 기간, 오히려 그의 작업 방향을 더욱 공고히 한 기간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굳이 세분할 필요는 없다.

제1기는 그의 모색기로 주제가 큰 중요성을 갖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외부환경의 영향이다. 1980년을 전후한 시대상황은 정치적으로 매우 암울했고, 경제적으로도 사회의 빈부의 격차가 급격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당시에 많이 읽히던 소설은 도시 하층민이나 소외 계층의 삶과 애환을 애정과 책임을 가지고 묘사해 내던 작품들, 예를 들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 윤흥길의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남자> 등등이다. 독자들의 도덕심과 정의감에 호소하는 이러한 소설 속에는 1980년 5월 광주의거로 분출되기까지 누적된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 그로 인한 갈등들로 가득 차 있었고, 시대적인 호응을 얻었다.
문단과는 달리 화단에서는 그 시대를 표현한다 할만한 조형언어를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다. 주도적인 주의도 양식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작은 바람을 일으킨 화풍인 하이퍼 리얼리즘이나 백색평면주의에 빠져들지 못했던 오원배 세대의 자가들은 그래서 대부분 그 시대의 문학 작품이 일깨운 현실의식에 경도하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개혁을 부르짖고 나선 작가들도 있었고, 간접경험을 작품화하기도 했고, 적어도 자신을 피폐한 모습으로 변모시켜서라도 시대상황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시기를 민감하게 포용했던 오원배는 이때 가면이나 탈, 탈을 쓴 비참한 몰골의 인간상을 그린다. 시대를 풍자하는 듯한 회색조의 화면에 왜곡된 형상들, 일그러진 표정의 탈이 지배적인 그림들이 거칠고 강렬한 대조의 색채로써 제작되었다. 그는 해학적인 탈보다는 일그러진 탈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소재들이 그 시대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는가? 이러한 작품들은 감상주의적 소재에 의한 것이며, 작품화되어서도 그 감상주의적 면모를 벗 어나지 못한다. 그의 가면 쓴 인물들은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면 서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기력감을 드러낸다. 화가는 남다른 방법으로 현실과 투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의 사회적 신분의 영향도 있지 않겠는가? 사실 상 대학생 혹은 졸업한 룸펜은 외관상 주머니 속에 먼지밖에 가진 것이 없는 무산자이자 미 래형 유산계급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여는 그가 자신의 조형형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을 노골적으로,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의,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 권위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소외는 인간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언급했듯이 시대 상황적인 것이다.
그는 이 시기에 가면이나 탈 이외에도 머리가 떨어진 (중대한 상실) 불상, 선사시대의 고인돌, 선돌을 소재로 한 작품들 등등을 제작한다. 우리는 이를 그가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가지고 다양한 주제들의 목록을 만들었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는 최근에 과거의 목록에서 주제들을 조금씩 다시 끌어내고 있다.)

1982년 10월 빠리로 간다. 그는 이때 새로운 재료와 표현 방법에 접하게 되고, 그 실습에 대단한 열의를 보인다. 그는 영상을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물감 같은 재료들이 스스로 표현력을 가진 물질이며, 이를 그 자체로 보는 시각을 그때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제1기의 비참한 주제는 아래로 숨고, 물감과 화포 그 자체가 주제가 되는 그림을 제작하기에 이르 른다. 즉 억압받은 인간, 소외된 인간 같은 그의 주제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그 표현방법이 크게 바뀐 것이다. 그림에 대한 본질적인 시각 변화라 할만하다. 그래서 과거의 그림에서 우 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이 주제에 걸쳐진 초라한 모습의 화면이라고 한다면, 이때의 작품은 회화적으로 충만한 작품일 것이며, 우리는 여기서 문학성 위에 군림하는 회화 그 자체의 당 당한 모습을 보게 된다.

거대한 크기의 화면 위에 거칠게 쏟아 부어진 필치와 검은색 안료, 형상을 만들거나 부수는 흰색, 옅은 황색의 선들은 스스로의 표현력을 가지고 분방하게 화면을 누빈다. 그리고 이 화면에서 성적 욕구의 충족에 광분하는 검은 짐승-인간이 인간의 부재 상태를 보여 준다. 그의 주제는 유신정권 아래의 상황이라는 구체적인 시대상황에 의해 촉발된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이제는 한층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확대된다. 도덕과 법의 제약까지도 일축해 버릴 정도로 타락한 인간의 폭력성, 야만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과거의 무형의 주제가 이제 그에게 합당한, 또 그를 떠받칠 수 있으며, 스스로 독립된 가치를 가질 수도 있는 회화적 형식이라는 유형의 틀을 찾았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 속에서 그의 삶과 경험, 심리 속에서 발생된 주제가 그가 열광적으로 추구했던 질료의 표현성으로 보완된 것이다.

1985년 가을 귀국 후에 그는 이 검은 짐승-인간을 더 발전시킨다. 주제로서보다는 회화 작품으로서의 성격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번 초대전에 출품된 작품들에서, 구조물 속을 떠도는 혹은 투쟁하는 짐승-인간은 조용해 졌다. 이제는 오히려 기둥들, 미로를 연상시키는 벽들 같은 구조물들이 더욱 거칠어지고 표 현적이어서 작품의 주인이 되고 있다. 새로이 그의 작품의 주인이 된 이것들은 그에 따르자 면 그릇되거나 효용을 상실한 인습, 관례 혹은 타개되어야 할 상황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자유로운 인간을 억압하는 유. 무형의 모든 것을 상징한다. 형상은 마치 유령처럼 혹은 영혼 처럼 푸른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푸른색인 이유는 조형적 측면에서 배경에 가장 적당한 색이며, 어둡고 암울한 인물의 분위기를 위해서 선택된 색이라고 한다.

그의 설명을 따라 들어 가자면, 그는 주제가 있는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의 주체가 되는 인간보다는 그를 억압하는 상황묘사가 더 중요시되고 있으며, 그의 작품이 주는 시각적 매력은 인간보다는 배경에서 나온다는 이상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점은 오원배의 작품에만 해당되는 문제점이 아니다. 이는 차라리 주제를 다라서 작품을 감상할 때 항상 수반되는 위험이다. 어느 누구도 작가가 어느 곳으로 비약을 하며, 무엇 때문에 주된 것보다 부차적긴 것에 매력을 느껴 빠져 버리는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최근작에서 그가 성장해 온 과정, 중요한 사 건들의 의미를, 그리고 그 사건들이 그에게 무슨 영향을 주었는가 등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작품 감상을 주제에 비추어서 할 때 부딪치는 문제점이며, 그래서 우리는 다시 회화 자체의 평면으로 시선을 옮겨야 하는 것이다. 오원배의 작품에는 과거부터 성숙되어 오는 주제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언어나 기호로써 나타나 있기 때문에 분명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이 장벽-그의 심리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이 장벽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작품 자체로 관심을 둘릴 수 있는 자유를 주며,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회화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완성된 서구조형양식을 무조건 차용하는 창작은 위험하다. 그만큼 위험한 또 하나는 주제의식만을 가지고 무형식 속에서 방종하는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의식 내부로부터 또 예술세계라는 미술양식으로부터 동시에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현실에 깨어 있는 눈과 예술세계에 대한 열정의 합일이야말로 진정한 창작의 기본이기 때문이며, 베껴먹기, 후진적 아방가르드 같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오원배의 작품이 진지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는 행위, 축적된 행위의 흔적들에 의한 풍부한 화면을 보면서, 그 강렬한 회화성과 함께 그가 가진 인간소외라는 주제가 그의 다양한 형식들을 줄곧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외당한 인간의 서글픔이 70~80년대를 함께 살아온 우리의 가슴에 조용히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구조물인 인습, 비리, 부정들에 도전하며 가망 없는 싸움을 하는 힘없는 푸른 인간들은 그 구조물들을 결코 타개하지 못하고 푸른 악기로 무성의 슬픈 연주밖에 할 수 없는 우리들의 초상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러한 주제와 풍부한 화면이 합치된 것이 그의 작품의 요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여기에서 어두운 시대를 무관심하지 않게 관통해 나온 그 시대의 작가가 서양 미술의 양식 차용이나 아류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세계를 찾아가고 있는 장관을 마주하는 것이다.

세워진 그 광장은 한창 공사중이었고, 나무판자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 벽에는 소위 낙서화라는 것들이 꽉 차 있었는데, 필자는 그 혼잡함 속에서 “불란서 졸개들을 데리고 와서 그린다”라는 문장을 발견했었다. 내심 통쾌감을 주었던 이 그룹 낙서화의 대장은 당시 에꼴 데 보자르의 얀켈 화실에서 수학하던 과대표 오원배였다. 그러나 그의 화력에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사건이 지금의 작품들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를 밝힐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