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06] 불길한 정체성을 찾는 미로 - 이종숭(1992)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1992.11, 공간. 이종숭(미술평론가)

오원배 전시전의 도성 속에 등장하는 것은 각목의 구조물과 미로처럼 구획 지워진 분할구조물, 그리고 거기에서 표류하는 이간 군상의 모습들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그의 도장도 과거의 그의 도상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구조의 모순과 상충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의 표출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과거와 변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복잡한 도상 구조를 상당히 단순화시켰으며, 그에 따라 표현의 집중력을 높였다는 점이다. 이 점을 두고 정영묵은 서문에서 [단순함에서 오는 집중된 결합력의 구조적인 역동성이 더욱 돋보인다.]고 평했다. 이에 따른 그의 표현 방법의 변화도 눈에 띈다. 과거 그의 도상에서 각목 구조물과 분할구조물들은 인체라고 하는 전경을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후경 역할을 했다.

반면에 현재의 그의 도상들은 이에 인체의 전경을 없애버리고 구획 지워진 구조물로만 전체 화면을 채운다던가, 혹은 인체가 등장하더라도 과거의 경우와는 달리 크게 부각되지 않는 흐릿한 선과 색채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화면 내에서 인체가 차지했던 비중이 현재는 상당히 감소한 것으로 보여진다. 과거 그가 표현했던 신체가 상당한 동적인 왜곡을 바탕으로 했던 것임에 반해, 현재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인체는 다분히 정적인 형태로 치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인체는 화면 내에 그림자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희미하게 느껴지지만,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실존 상황이라는 주제에 대한 타당한 우회적인 접근방법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은 과거 그가 한때 해왔던 변형 캔버스 작업(인체와 구조물들의 결합에 있어 인체의 전경을 훨씬 강조하기 위해 캔버스의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서 사용한 경우)에서 현재와 같은 기존의 사각형 캔버스 작업으로 되돌아왔다. 이 경우에 대해 그는 [주위의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지 않고, 구조물들의 구조적인 결합력 자체만으로도 잘라냈을 경우 발생하는 효과 이상의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인체의 형상을 어느 정도 자신의 화면에서 소외시킨 채, 미로와 같은 대단위 분할 구조물들을 화폭에 그려내고 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분할 구조물들로 된 미로는 희랍 신화에서 데일루스(Daedalus)가 미노스(Minos) 왕의 궁전에 만들어준 미로처럼 덮개가 위에 씌워져 있지 않은 열려진 공간으로 나타난다. 화면의 미로에서 평면적으로 탈출이 불가능하지만, 입체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탈출구는 있게 마련해놓은 저이 대단히 재미있다. 그 미로는 인간의 불길한 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실존적 한계 상황에 대한 표상으로서만 나타날 뿐만이 아니라, 수직적 상승이 가능하다면 충분히 관망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탈출구를 작가 자신이 화면에서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도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 선명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또 그의 작업의 전체를 압도하는 분할 구조물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인체의 모습도 대단히 함축적인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삶의 모습은 다분히 물질화되어 나타난다. 그의 화면에서 세계의 억압된 모습 속에 투영된 인간의 몸짓과 노동, 그리고 그의 표정은 과거와 같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화석화된 물질의 흔적처럼 그려져 있다. 환상적인 영화의 한 자연에서와 같이 납득하기 어려운 공간의 설정 속에 삽화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것만 같은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깊은 땅속에서 발굴된 화석이 발산하는 냉기를 갖고 있는 듯하다. 지하묘소의 버팀목처럼 보이는 각목의 구조물들과 공간을 분할하고 구획 지워주는 미로 형태의 구조물들, 그리고 거기에 안치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오원배의 그림들은 구축된 구조의 음험함과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사고의 기반을 상실한 현대인의 잔상을 시니컬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사고하는 것은 거주하는 것에 속한다]고 했을 때, 오원배의 그림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문의 울림은 자뭇 심각할뿐더러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게 하듯 난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의문의 장소는 비교적 분명하다. 즉, 그곳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거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하는 의문과, 과연 사고할 수 있는 기회가 그 속에서 주어져 있느냐는 반성의 자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