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0005] 고통의 체험, 고통의 찬미 - 김현도(1992)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전시: 오원배展(1992.10.8-10.17, 갤러리서미)
리뷰: 고통의 체험, 고통의 찬미
글 : 김현도(미술평론가)
일단 한 작가가 어떤 주제에 대한 형식 실험을 마무리지었을 때, 우리는 당분간 그의 개화된 세계를 흡족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을 내용과 형식의 동일화가 성취되었다든가 혹은 작가의 개성적 양식이 발현되었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림그리기’라는 형식 속에서 우리가 쉽게 이것은 누구 아무개 그림이라고 이름을 대는 일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작가의 편에서 보면 그것은 반드시 오랜 고통과 인내를 담보한 후에야 확인을 받을 수 있는 구경꾼과의 계약이다. 왜냐하면 반복해서 그려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회화적 양식이란 자신의 한계를 치열하게 성찰하지 않은 작가에게는 자기 기만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개성이란 그의 한계가 형식화된 내용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오원배의 붓 자국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심상찮은 일이다. 그는 오랫동안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줄기차게 추구해온 작가이다. 사회적인 조건 때문이건 실험적인 인과에 의해서건 그의 인물들은 몹시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와 골조, 그리고 그들이 마주친 두터운 벽면과 장애물들은 아픔의 형상과 상처의 색조 그대로다.
좀더 자세히 보자. 자세히 보면 더 아픈 것은 저 붓 자국들이다. 불규칙하고 불연속적이며 일그러지고 뒤틀린 단점 투성이의 붓 자국들은 그대로 고통의 근육과 갈등의 표피 자체이다. 고통에 관한 철저한 육감없이 저절로 그것들이 생겨날리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의 오랜 고통의 체험을 수긍하고 그 붓질 위에 자신의 갈등과 아픔을 옮겨놓는 것이다.(이때 우리의 느낌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든가 인간의 실존적 정황이라는 때문은 언어를 벗어난다. 우리는 그것들의 부단한 촉감에 몸서리치거나 반대로 온갖 체험의 본연적인 모순과 마주친다.) 이 그림들은 오히려 맑은 거울이다. 그 속에 우리의 고통이 낱낱이 드러나거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통의 배후가 비친다. 우리가 이 속에서 고통의 육화를 넘어선 고통의 찬미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