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실존적 변주

[A0004] 인간과 구조간의 긴장 관계 - 정영목 (1992)

October 21st, 2007 Posted in Prior Article

전시: 오원배展(1992.10.8-17, 갤러리 서미)
리뷰: 인간과 구조간의 긴장 관계 / 실존의 상황을 위한 오원배의 조형성
글    : 정영목(숙명여대교수, 서양미술사, 미술평론)

I.
198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두 차례의 개인전과 여러 기획전, 그룹전을 통하여 과감하고 끈 기있게 자신의 독자적인 스타일의 창출과 그것에의 확신, 그 위에 또 다른 가능성과 변환을 시도해 온 오원배의 작가로서의 중요성에 비하여, 그와 그의 작품을 다룬 평문은 상대적으로 적었었다. 그나마 지금껏 그를 다룬 짧은 신문 기사나 서문 또는 본격적인 작가론(최태 만, 오원배 : 동요와 불안의 군상, [가나아트]1989.5~6월호) 등은 대개 주제적인 측면에서 그 의 작품을 풀어나가 주로 작품의 내용과 의미, 그것과 사회와의 관계 등을 설명하는 것이 평론가들의 주된 관심이었다. 때문에 양식적인 측면에서 그의 작품을 형성하는 여러 요소들 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그것들의 변환 과정 등에 관한 검토가 없었으므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작가의 조형성에 의하여 그 주제를 수용하는 형태로서의 틀에 대한 명확한 관계를 규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측면을 보완한다는 입장에서 오원배의 작품에 나타난 인체와 구조물간의 변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조형성에 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II.
주제적인 측면에서 오원배의 작품이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과 부조리, 그에 따른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그 나름대로의 조형 언어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이제 더 이상 들먹일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이러한 주제 의식을 위하여 작가는 주로 인체 혹은 인체의 형상을 닮은 짐승과 직각 형태의 구조물들을 그려왔다. 물론 크게 나누어 이러한 두 요소로 대변되는 화면의 구성 요소 이외에도 말뚝, 사다리, 가면, 화투, 거미, 병, 숫자, 기호 등의 오브제로서의 성격 이 강한 것들도 등장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잡다한 오브제들이 최근에 와서는 많이 삭제되었다. 이러한 오브제 중에서 1987년 경가지 사용된 것으로서 가장 독특하게 우리의 뇌리에 남는 것은 역시 신문지의 꼴라쥬로 이루어진 인체의 형상일 것이다. 또한 최근의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숫자 등과 같은 것들에 특별한 주제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꼴라쥬를 포함한 이러한 오브제 성격의 액센트는 작가의 말처럼 대체로 순수한 조형성의 향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순수한 조형성 이외의 목적으로 화면에 나타난 숫자들에 구태여 의미를 붙이자면, 인간의 모든 개성 마저도 숫자화 되어 가는 현대 산업 사회의 삭막함과 인간성에 대한 위기 의식을 상징할 것이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조형성을 위한 위와 같은 오브제적 요소들이 과감하게 생략된 최근의 작품들은 작가의 긍정적인 변환을 예시해 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1990년 이전에 자주 등장하던 잡다한 오브제적 요소들은 회화적인 풍요로움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고, 어떻게 보면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을 많이 동원시켜 무엇을 억지로 설명하려 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잡다한 오브제적 요소들이 오히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리얼리티를 더욱 약화시킬 수도 잇다는 생각에서, 아마도 작가는 최근에 와서 이러한 리얼리티를 단순하게 표현하여 더욱 나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으리라. 때문에 오원배의 최근 작품은 과거의 복잡 다단한 양상과는 달리 주제를 위한 간결하고 단순한 두 세가지의 회화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최근의 이러한 단순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장점이었던 역동적인 구도와 주제에 대한 격렬한 문제 의식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순함에서 오는 집중된 결합력의 구조적인 역동성이 더욱 돋보이며 주제에 대한 접근 역시 더욱 과감해지고 객관적이다.

III.
오원배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던 탈, 가면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탈과 가면의 이미지가 그가 의도하는 작품의 주제 의식을 높여주는 것은 사실이나, 최근에 올수록 그것은 점차 순수하고 개관적인 조형성을 지닌 보편적인 상징의 도구로 사용되어 진다. 가면 혹은 탈에 관한 오원배의 관심은 이미 1970년대부터로 그의 1979년 작품(도.1)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정치, 사회 현실과 한국적 전통의 수용이라는 지극히 일차적인 젊은 의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 어떠한 주제의 일부분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상징의 도구로 사용된다. 가령 그의 1987년의 [무제](도.2)에서의 각시탈 이미지는 인체와 각목들의 구조물로 형성된 상황을 설명하거나, 아니면 관조적인 표정으로 바라보는 제삼자로서의 입장을 대변해 준다. 이러한 한국적 이미지로서의 탈은 1989년의 [무제](도.3)에서 그것의 명확한 정체와 주체성을 뛰어넘어 더욱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이미지로서의 탈 혹은 가면을 조형적인 측면에서 사용한다. 1970년부터의 탈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변환을 읽지 못한 일부의 평론가들 이 단순한 형태만의 유사성으로 오원배의 인체나 얼굴 이미지들을 서구의 신표현주의 작품과 연관지으려는 관점은 타당하지 않다.

인체의 묘사 방법에 있어서도 오원배의 변환은 탈이 변화하는 과정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꼴라쥬를 사용한 초기의 격렬하게 뒤엉킨 인체의 형태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짐승에 가깝다. 이것은 분명 표현성의 강도를 높여주는 방법으로서 인간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형태이다. 1987년 이전의 이러한 왜곡된 신체(도.4)는 작가 특유의 조형성이 주제 의식에 걸맞는 표현 방법이었으나, 배경으로 처리된 구조물과 오브제적인 요소들과의 이질적인 거리감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신체가 너무 부각되어 그림이 지나치게 주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려졌다는 느낌을 주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작가는 1988년부터 인체와 구조물과의 가상적인 공간감을 없애고 기존의 사각형 틀의 화면과 액자의 개념을 탈피하여 인간과 구조물이 자유자재로 엉킨 형태(도.5)의 외곽선을 그대로 도려내어 인간과 구조물간의 통상적인 개념(인간=주제, 구조물=주제를 위한 배경)을 깨고 둘 다 동등한 입장으로 평면에 존재하게끔 배치했다. 또한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항은 인체의 묘사에 대한 왜곡의 정도가 과거에 비하여 완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인체를 짐승과 같은 괴물로 표현한 과거에 비하여 이제는 두 다리와 두 팔 그리고 머리 부분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인체의 묘사에 있어서의 사실성의 회복은 이번에 전시되는 가장 최근의 작품(도.6)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화면은 다시 기존의 사각형 틀로 돌아갔지만 화면 내에서 이제는 거꾸로 구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간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현저하게 높다. 때문에 인간은 오히려 구조물에 소속된 하찮은 부수물과도 같은 존재로 취급되는 듯한 느낌이다. 인간의 묘사에 있어서도 이제는 마치 모델이나 사진을 사용한 것 같은 사실성이 엿보이며, 과거의 수많은 획에 의하여 표현된 인체보다는 간결한 몇 개의 선과 윤곽선, 또한 어느 정도의 입체감을 위한 명암의 사용 등으로 오히려 전통적인 데생이나 에스키스에 의한 균형 잡힌 인간의 모습이다.
인체의 묘사와 구조물과의 이러한 작가의 변환 과정에서 과거에 비하여 왜곡의 정도가 감소하면서 사실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 주제의 강렬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주의적 경향과 상반된 느낌을 줄 수도 있겠으나, 표현의 강도를 왜곡의 정도 차이가 아닌 형태의 단순함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주제 의식에 대한 조형적 확신을 오원배의 최근 변화한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확신은 주제에 대한 그의 접근 태도가 이전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IV.
인체와 구조물이 단순화되어 가는 최근의 작품에서 우리는 작가가 자신의 주제 의식을 잡다 한 군더더기의 설명적 태도 없이도 단순한 형태로 풀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번 전시 작품에 나타나는 오원배의 가장 큰 변화는 인체의 동적인 표현으로 화면에서의 상황을 이끌어 나가던 과거- 때문에 구조물은 무대의 세 팅(Setting)과도 같은 배경으로만 존재했고, 주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이 서술적이었음-에 비하여 지금은 인체의 개입없이도 화면의 상황을 나갈 수 있다는 작가의 진보된 확신이다. 가 령 미로(迷路)와도 같은 블록 형태의 구조물들간의 상호 역동성만으로 인간 없이 인간의 실 존적 상황을 표출하려 한 이번 전시의 작품(도.7)은 작가의 이러한 변화를 가장 구체적으로 반영해 주는 예이다.

인체에 비하여 구조물의 비중이 화면을 압도하는 최근의 작품들이 작가의 갑작스런 태도의 변화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결과의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면 그 나름대로의 설득력 있는 변환의 과정을 감지할 수 있다. 우선 1987년 이전의 구조물들은 분명 주제의 서술적 공간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작가는 초기의 서술적 공간을 없애면서 설치적인 방법을 도입, 인체와 구조간의 결합력이 강렬하면서도 인체가 튀어나오게끔 보일 수 있는 입체감의 효과를 쉐입트 캔버스(Shaped canvas)에서 찾게 된다. 기존의 서술적인 묘사 방법을 무시하고 여러 시점에서의 묘사 방법과 왜곡된 원근법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배합된 인체와 구조간의 불합리한 만남과 조합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나타내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러한 상징성을 떠받쳐 주는 구조적인 틀로서의 쉐입트 캔버스는 주제와 양식의 강렬한 조형적 결합력을 이룩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쉐입트 캔버스에서 기존의 사각형 캔버스로 다시 돌아온 최근의 작품 사이에는 그 둘의 형태를 절충한 중간 스타일로서의 캔버스(도.8)가 있는데, 이때부터 (1990년) 오원배의 작품에는 뚜렷하게 구조물이 화면을 압도한다. 구조물의 부분은 쉐입트 캔버스의 경우처럼 잘라내 버리고 인체가 있는 공간 부분은 기존의 각진 형태를 유지한다. 마치 구조물에서 인간이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한계 상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이러한 형태의 캔버스는 작가가 최근의 기존 캔버스로 환원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 준다. 즉 최근의 기존 캔버스 내에서 “주위의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지 않아도 구조물들의 구조적인 결합력 자체만으로도 잘라냈을 경우에 발생하는 효과 이상의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잇다.”는 작가의 확신을 이유 있게 만들어 주는 중간 단계가 위와 같은 작품인 것이다.